대구호빠 대구역사2
안녕하세요
호빠 No.1 대구호빠입니다.
지난시간에 이어 오늘도 대구 역사에 대해 한번 알아보실게요
통일신라시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신문왕 9년(689)에 신라의 도읍을 경주에서 달구벌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을 만큼 대구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신라의 오악(五岳) 가운데 팔공산을 중악(中岳)으로 숭배했던 점 등으로 보아도 그 당시 대구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행정체계인 군현체제 아래서 대구는 위화군과 달구화현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경덕왕 16년(757)에는 위화현이 수성군으로, 달구화현이 대구현으로 개칭되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대구(大丘)’라는 지명이 기록에 나타나게 됩니다.
고려시대
후삼국시대에는 왕건과 견훤이 수도 경주를 차지하기 위해 팔공산에서 접전을 벌인 「공산전투」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대구가 신라 말까지도 왕경인 경주와 지방을 연결하는 군사 · 교통의 요충지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려 초기의 대구지역은 수성군, 대구현, 해안현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대구현은 수성군에, 해안현은 장산군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후 인종 21년(1143) 대구현에 현령관이 파견되면서 점차 그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무신정권기에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났을 때 대구가 그 중심지의 하나가 되었고, 몽고 침입기에는 부인사에 소장되어 있던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었으며 전란을 피하여 팔공산 공산성에서는 항쟁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출처: 대구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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